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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이다, 세계를 매료시킨 한지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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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여러분, 비단은 오백 년을 가고 우리 한지는 천 년을 간다는 옛말,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지요? 저는 평생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담그며 닥나무 껍질을 두드려 온 예순다섯 살의 늙은 한지 장인입니다. 흔히 한지라고 하면 시골집 낡은 창호지나 붓글씨 쓰는 옛날 종이로만 생각하기 쉬운데요. 만약 이 소박한 종이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국보급 보물을 살려내는 첨단 복원재로 쓰이고, 물에 빨아 입는 명품 옷과 우주 시대의 신소재로 전 세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제가 지난 일 년간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직접 겪은,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우리 한지의 놀라운 변신 이야기! 지금 바로 들려드리겠습니다."
※ 1: 파리에서 날아온 편지와 천 년의 비밀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제 손바닥 한번 보시렵니까? 마디마디가 굵게 휘어지고 손톱 밑에는 하얀 닥나무 섬유질이 굳은살처럼 박여 있지요. 저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 자락에서 아버님 대부터 이어받아 반백 년 넘게 전통 한지를 뜨고 있는 올해 예순다섯 살의 한지 장인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고집불통 종이 노인네라고 부릅니다. 세상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기계로 찍어내는 값싼 양지를 두고, 추운 겨울날 얼음장 같은 맑은 계곡물에 손을 담가 가며 대나무 발로 종이를 한 장 한 장 건져 올리고 있느냐고 혀를 차곤 했지요.
실제로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제 마음 한구석에는 늘 서글픈 그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 아들도, 그리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제 손녀딸 지은이도 처음에는 이 고되고 돈 안 되는 일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았거든요. 지은이가 어릴 적 방학 때 시골 제 작업장에 내려와 닥나무 삶는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종이 뜨는 모습을 구경할 때면, 저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습니다.
"지은아, 저기 문에 발라 놓은 하얀 창호지 좀 보아라. 우리 조상님들은 말씀하셨단다. 비단은 오백 년을 가지만, 우리 한지는 천 년을 간다고 말이다. 저 종이는 죽은 나무판자가 아니라 살아서 숨을 쉬는 생명체란다."
그러면 당시 열 살배기였던 손녀 지은이는 코를 찡긋거리며 이렇게 되묻곤 했지요.
"에이, 할아버지도 참! 종이가 어떻게 숨을 쉬어요? 그리고 물에 젖으면 흐물흐물 찢어지는 종이가 어떻게 천 년이나 가요? 내 공책은 일 년만 지나도 누렇게 변해서 부스러지는데요!"
그럴 때면 저는 껄껄 웃으며 손녀의 작은 손을 잡고 공방 한구석에 쌓인 일년생 참닥나무 껍질과 황촉규, 즉 닥풀 뿌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건 네가 쓰는 공책이 서양 기술로 만든 양지라서 그렇단다. 서양 종이는 통나무를 기계로 잘게 갈아내고 거기에 독한 화학 약품과 산성 풀을 섞어서 찍어내지. 그러니 처음에는 반들반들하고 하얗게 보여도, 백 년만 지나면 종이 속의 산성 성분이 스스로를 갉아먹어서 과자 부스러기처럼 바스락거리며 부서져 버린단다. 학자들은 그걸 두고 종이가 스스로 불타 없어진다고 해서 느린 화재라고 부르지. 하지만 우리 한지는 다르단다."
저는 손녀의 눈높이에 맞추어 우리 선조들이 발견해 낸 위대한 과학 발명품, 한지의 제작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 한지는 겨울철에 베어낸 일년생 닥나무의 속껍질인 백피만을 골라 쓰는데, 이 섬유질이 얼마나 길고 질긴지 모른다. 그걸 화학 약품 대신 콩대를 태운 재나 메밀짚을 태운 잿물, 즉 천연 알칼리성 양잿물에 넣고 가마솥에서 푹 삶아내지. 그리고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며칠을 씻어 햇볕에 자연 표백을 시킨 뒤에, 절구와 방망이로 수천 번을 두드려서 섬유질을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펴주는 거란다. 이걸 고해(叩解) 작업이라고 하지. 칼로 자르는 게 아니라 방망이로 두드려서 펴주니 섬유질의 긴 가닥이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는 게야."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한지가 천 년을 견디는 가장 결정적인 과학적 비결은 바로 닥풀이라 부르는 황촉규 뿌리 점액과,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종이 뜨기 기법인 외발뜨기에 숨어 있습니다.
"이 미끈미끈한 닥풀 뿌리 진액을 찬물에 풀고 닥나무 섬유를 섞은 뒤, 줄 하나로 매단 대나무 발로 물을 앞뒤로 밀고 당기고, 다시 좌우로 흔들어서 흘려보내며 종이를 건져 올리지. 일본의 화지나 중국의 선지는 양손으로 발을 잡고 가만히 가두어 뜨는 쌍발뜨기를 쓰기 때문에 섬유질이 한쪽 방향으로만 누워서 한쪽으로 힘을 주면 쉽게 찢어진단다. 하지만 우리 한국의 외발뜨기는 물이 십자 방향으로 격렬하게 흐르면서 긴 닥나무 섬유들이 가로세로 촘촘하게 그물처럼 엉겨 붙게 만들지. 그래서 어느 쪽으로 잡아당겨도 절대 쉽게 찢어지지 않는 질긴 생명력을 갖게 되는 거란다. 게다가 잿물로 만들어 중성을 띠니 천 년이 지나도 삭지 않는 것이고!"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자랑을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켜야 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과학 유산이면 무엇 하나. 요즘 세상에 누가 붓글씨를 쓰고 누가 창호지를 바른다고... 이 늙은이가 죽고 나면 이 천 년의 기술도 박물관 유리창 속 유물로만 남겠구나.'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줄만 알았던 제 산골 공방에, 어느 날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을 기적 같은 편지 한 통이 바다를 건너 날아왔습니다. 바로 지난해 봄, 이제 어엿한 스물다섯 살의 현대 섬유 디자인 전공 대학원생이 된 손녀 지은이가 파랗게 질린 채 노란 봉투 하나를 흔들며 제 작업장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던 날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큰일 났어요! 대박이에요! 지금 이 편지 어디서 온 건지 아세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세계 최고의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문화재 복원실에서 할아버지께 보낸 공식 초청장이에요!"
"뭐, 뭐라? 루브르 박물관? 거기가 어디메냐? 내가 양코배기들한테 빚진 것도 없는데 왜 나를 부른단 말이냐?"
저는 닥나무를 두드리던 방망이를 내려놓고 안경을 고쳐 썼습니다. 지은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어로 적힌 편지를 번역해 읽어 내려가는데, 그 내용은 평생 한지밖에 모르고 살아온 이 늙은이의 심장을 방망이질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 2: 루브르의 보물을 살려낸 세상에서 가장 얇은 종이
손녀 지은이가 읽어준 루브르 박물관 복원 책임자 막심 박사의 편지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유럽 각국의 박물관에 보관된 수백 년 된 다빈치의 스케치와 고서화, 그리고 왕실의 유물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부식되어 가고 있는데, 그동안 복원재로 써 오던 서양의 화학 종이나 일본의 화지(Washi)보다 훨씬 더 얇으면서도 강도가 뛰어난 한국의 전통 한지 샘플을 우연히 접하고 충격에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샘플을 만든 저를 파리로 직접 초청해 복원 현장을 보여주고, 최고급 복원용 한지를 정식으로 납품받고 싶다는 간곡한 요청이었습니다.
"세상에나... 할아버지가 만든 한지가 루브르 박물관의 보물을 살리러 간다고요! 할아버지, 제가 통역으로 같이 갈 테니까 당장 짐 싸세요!"
손녀의 성화에 떠밀려 평생 시골 밖을 떠나본 적 없던 제가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가장 정성껏 뜬 초박형 한지 두루마리들을 보자기에 싸 들고 열두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서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지하에 위치한 거대한 과학 복원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저는 그 첨단 장비들의 규모에 한 번 놀랐고, 그 한가운데서 파란 눈의 외국인 연구원들이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 하얀 종이가 다름 아닌 제가 치악산 계곡물로 뜬 우리 한지라는 사실에 두 번 놀랐습니다.
우리를 맞이한 백발의 복원 책임자 막심 박사는 제 거친 두 손을 덥석 잡더니 존경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습니다.
"오오, 마에스트로 킴! 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장인어른을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이리 와서 이 현미경과 작업대를 좀 보시지요!"
막심 박사가 안내한 작업대 위에는 십팔 세기 유럽의 전설적인 부호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장했던 귀중한 고서화와, 막시밀리안 2세 황제가 사용하던 화려한 장식 책상이 놓여 있었습니다. 막심 박사가 한숨을 쉬며 설명하고, 손녀 지은이가 옆에서 귀에 쏙쏙 들어오게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마에스트로, 이 고서화의 뒷면을 보십시오. 백 년 전 유럽의 복원가들이 당대 최고의 기술로 만든 서양 양지로 덧대어 보수를 해 놓았는데, 세월이 흐르자 그 양지에서 산성 물질이 배어 나와 오히려 원본 그림까지 누렇게 태우고 딱딱하게 굳게 만들었습니다. 건드리기만 해도 낙엽처럼 바스러지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지요. 이를 살려내려면 원본 그림에 전혀 무게 부담을 주지 않을 만큼 거미줄처럼 얇으면서도, 물과 풀을 먹었을 때 절대 찢어지지 않는 강인한 종이가 필요했습니다."
막심 박사는 핀셋으로 작업대 위에 놓인 제가 만든 한지 한 장을 살짝 집어 올렸습니다. 그것은 제가 갓 피어난 애기닥나무 섬유만을 골라 가장 성긴 발로 단 한 번만 물을 흘려 떠낸, 무게가 1제곱미터당 단 2그램밖에 나가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얇은 비단 한지였습니다. 종이가 어찌나 얇고 투명한지 그 아래 놓인 고서화의 미세한 붓 터치와 글자가 유리를 통해 보는 것처럼 완벽하게 비쳐 보였습니다.
"원더풀! 브라보! 여러분, 이 한국 한지의 기적을 보십시오! 두께가 머리카락 한 올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아 그림 위에 덮어도 육안으로는 종이를 붙였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투명합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독창적인 외발뜨기 공법 덕분에 가로와 세로의 인장 강도가 똑같이 강철처럼 질겨서, 젖은 붓으로 밀어 붙여도 단 한 올의 섬유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황제의 책상 표면에 장식된 바다거북 등껍질과 자개 틈새를 메우는 작업까지 이 한지가 완벽하게 해냈습니다!"
실제로 연구원 한 명이 찢어진 고서화의 균열 부위에 천연 밀가루 풀을 묽게 발라 제 한지를 덮고 솔로 문지르자, 한지의 미세하고 긴 닥나무 섬유 가닥들이 마치 살아있는 나뭇잎의 잎맥처럼 고서화의 부스러진 섬유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단단하게 하나로 결합하는 모습이 전자현미경 화면에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아아, 세상에... 내 거친 손으로 찬물에서 건져 올린 종이가, 머나먼 이국땅의 죽어가는 천 년 역사를 다시 숨 쉬게 하는 심장 박동기가 되고 있구나!'
저는 코끝이 찡해져 차오르는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막심 박사는 제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습니다.
"마에스트로 킴, 서양의 최첨단 화학 기술이 백 년 만에 패배한 자리에서, 한국의 천 년 전통 과학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미 이탈리아의 바티칸 박물관에서도 교황청의 가장 오래된 친필 고문서를 복원하는 데 오직 한국의 한지만을 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한국의 한지는 이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인류의 문화유산을 구원하는 가장 현대적인 첨단 과학 소재입니다!"
박물관 연구원들이 일제히 보내는 기립 박수 속에서, 제 옆에 서 있던 손녀 지은이가 제 팔짱을 꼭 끼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할아버지, 제가 어릴 때 철없이 굴었던 거 용서해 주세요. 할아버지가 평생 지켜오신 그 차가운 물속의 노동이 이렇게 위대한 일이었는지 이제야 똑똑히 알았어요. 저, 할아버지 한지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더 재미있는 일들을 해보고 싶어졌어요!"
파리에서의 그 벅찬 감격은 끝이 아니라, 우리 한지가 펼쳐 보일 더욱 놀랍고도 화려한 변신의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 3: 물에 빨아 입는 종이, 한지사의 마법
파리에서 돌아온 뒤로 손녀 지은이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 공방에서 최고급 한지 수십 묶음을 챙겨 서울의 대학원 연구실로 올라가더니, 두어 달 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무언가에 골몰해 있더군요. 그러던 어느 화창한 초여름 날, 지은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할아버지! 이번 주말에 서울 성수동에서 우리 디자인 연구팀이랑 현대 공예가들이 모여서 특별 전시회를 여는데, 할아버지가 꼭 주빈으로 오셔야 해요! 오실 때 두루마기 입지 마시고 편하게 오세요. 제가 할아버지 입으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름 양복 한 벌을 직접 지어 놓았으니까요!"
호기심이 동한 저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손녀가 일러준 성수동의 한 붉은 벽돌 건물 작업실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저는 제가 잘못 찾아온 줄 알고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지 공방이라기에 지필묵이나 부채, 탈 같은 전통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마치 파리의 최고급 명품 의류 매장을 옮겨 놓은 듯 세련되고 현대적인 패션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네킹들마다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베이지색 재킷과 시원해 보이는 청바지, 그리고 중후한 멋이 풍기는 가죽 가방과 구두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오셨어요? 자, 어서 이리 와서 제가 만든 이 재킷 좀 입어 보세요!"
지은이가 반갑게 달려 나오며 마네킹에 걸려 있던 멋스러운 연갈색 여름 재킷 하나를 벗겨 제 어깨에 걸쳐 주었습니다. 옷에 팔을 끼워 넣는 순간, 저는 깜짝 놀라 옷깃을 쓰다듬었습니다.
"허어, 이 옷감이 대체 무엇이냐? 마나 모시보다 훨씬 부드러워 살에 닿는 촉감이 비단결 같으면서도, 입자마자 등줄기에 서늘한 바람이 통하는 것처럼 가볍고 시원하구나! 값비싼 수입 원단으로 만든 옷 아니냐?"
제 말에 지은이와 주변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지은이가 제 재킷의 소매를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놀라지 마세요! 지금 할아버지가 입고 계신 이 양복, 할아버지가 지난달에 원주 공방에서 직접 떠 주신 닥나무 한지로 만든 옷이에요!"
"뭐, 뭐라?! 이게 한지로 만든 옷이라고? 이 녀석아, 할아버지 놀리지 말아라! 종이로 옷을 만들면 땀이 나거나 비를 맞으면 다 젖어서 찢어질 것이고, 더러워져도 빨아서 입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종이로 양복을 만든단 말이냐!"
제가 믿지 못하고 손사래를 치자, 지은이는 눈을 반짝이며 작업실 한구석에 놓인 실타래 기계와 세탁기 앞으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할아버지, 옛날에는 종이를 그저 접거나 풀로 붙여서 썼지만, 이제는 첨단 기술과 만나 한지가 실로 다시 태어났어요. 이걸 한지사(韓紙絲)라고 불러요! 할아버지가 외발뜨기로 촘촘하고 질기게 떠 주신 한지를 1밀리미터도 안 되는 아주 가느다란 국수 가락처럼 길게 쪼갠 뒤에, 일 분에 수천 번씩 회전하는 물레 기술로 배배 꼬아 주면 이렇게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한지 실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친환경 면이나 실크를 조금 섞어서 직물로 짜내면 바로 지금 입으신 옷감이 탄생하는 거랍니다!"
지은이는 말을 마치고는, 한지사로 만든 하얀 셔츠 한 벌을 집어 들더니 물이 가득 담긴 투명한 세탁기 통 속에 풍덩 집어넣고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세탁기 날개가 윙윙 소리를 내며 거세게 돌아가고 하얀 물보라가 일자, 저는 저 아까운 옷이 다 풀 죽처럼 녹아내릴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아이고, 저 철없는 것! 아무리 실로 꼬았다 한들 근본이 종이인데 저리 거친 물살에 돌리면 휴지 조각이 되어 나오지 않겠느냐!'
하지만 십 분 뒤, 탈수까지 마친 세탁기 문이 열리고 지은이가 셔츠를 꺼내어 탁탁 털어 펼치는 순간, 저는 제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셔츠는 찢어지거나 보풀이 일어나기는커녕, 올 하나 상하지 않은 채 처음 그대로의 빳빳하고 매끄러운 형태를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나... 종이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는데 멀쩡하다니, 이게 무슨 조화 속이냐!"
"신기하지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닥나무 섬유의 결합력이 워낙 강해서 실로 꼬아 놓으면 물에 젖어도 절대 풀리지 않아요. 게다가 한지가 원래 가진 놀라운 능력이 이 옷에 그대로 살아 있어요. 세균이 번식하지 못하는 구십구 퍼센트의 천연 항균력이 있어서 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아이들이 입어도 가렵지 않고, 땀 냄새를 싹 잡아주는 소취 기능에다가, 면보다 땀을 두 배나 빨리 흡수하고 빨리 말라버려요!"
지은이는 이어서 옆 선반에 놓인 중후하고 멋스러운 갈색 서류가방과 자동차 시트 가죽 샘플을 집어 제게 건넸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만져 보세요. 이건 한지 위에 친환경 식물성 코팅을 입혀서 만든 비건 한지 가죽, 이른바 하운지예요. 요즘 전 세계적으로 동물을 죽여서 만드는 가죽이나 석유로 만드는 인조가죽 대신 환경을 지키는 친환경 소재가 대세인데, 유럽의 유명 명품 브랜드와 고급 자동차 회사들이 이 한국 한지 가죽을 서로 쓰겠다고 줄을 서고 있답니다! 소가죽보다 훨씬 가볍고 물에도 안 젖고, 나중에 버려져도 땅속에서 자연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니까요!"
저는 한지 가죽으로 만든 가방의 오돌토돌하면서도 따뜻한 질감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잃었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의 추위와 화살을 막아주기 위해 한지를 여러 겹 누벼서 지갑(紙甲)이라는 종이 갑옷을 만들고, 한지에 콩기름을 먹여 물이 새지 않는 장판과 우산을 만들었던 그 슬기로운 과학 정신이, 손녀 세대의 젊은이들 손을 거쳐 이십일 세기 전 세계가 열광하는 친환경 패션으로 부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4: 빛과 숨을 품은 모던 인테리어 공방
성수동 패션 작업실에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손녀 지은이는 저의 손을 잡아끌고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 위치한 또 다른 현대 공예가의 작업실로 안내했습니다. 그곳은 지은이와 함께 협업하고 있는 마흔 살의 젊은 공간 디자이너 박 작가의 아틀리에였습니다. 서까래가 멋스럽게 드러난 한옥 내부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개조한 그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저는 마치 구름 위의 달궁전에 들어온 듯 황홀하고도 따스한 기운에 감싸였습니다.
작업실 천장과 바닥 곳곳에는 보름달처럼 둥근 모양부터 백자 달항아리 모양, 그리고 바람에 물결치는 파도 모양에 이르기까지 기하학적이고 세련된 형태의 한지 조명 수십 개가 매달려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 장인어르신! 어르신께서 보내주신 줌치 한지와 낙수지로 만든 저의 새로운 조명 작품들입니다. 어르신이 오신다기에 특별히 불을 다 밝혀 두었습니다."
박 작가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며 조명의 밝기를 조절했습니다. 저는 그중 달항아리 모양의 커다란 스탠드 조명 앞에 다가서서 그 빛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참으로 기묘하고도 아름답구려. 요즘 서양식 유리 전등이나 플라스틱 조명은 빛이 너무 차갑고 날카로워서 오래 쳐다보면 눈이 시리고 피로한데, 이 한지 조명을 통과해 나오는 빛은 마치 봄날 아침 안개 너머로 비치는 햇살처럼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하구먼."
제 말에 박 작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어르신! 바로 그것이 전 세계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한국 한지 조명에 매료된 이유입니다. 서양의 유리나 아크릴은 빛을 직선으로 통과시키거나 차갑게 반사하지만, 어르신께서 만드신 한지는 수많은 닥나무 섬유 가닥들이 불규칙하게 얽혀 있으면서 그 사이사이에 미세한 공기구멍을 품고 있지 않습니까? 전구의 날카로운 인공 불빛이 그 닥나무 섬유 층을 통과하면서 수만 번 부드럽게 굴절되고 산란하여, 사람의 눈과 뇌를 가장 편안하게 해 주는 자연광에 가까운 빛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최근 제가 이 한지 조명을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 출품했더니, 유럽의 최고급 호텔들과 부호들이 거실 조명으로 쓰겠다며 현장에서 전량 주문을 해 갔습니다!"
"허허,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호롱불 켜 놓고 창호지 문 너머로 바느질하시던 그 은은한 달빛의 정취를 서양 사람들도 알아본다는 말이로군!"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르신. 저쪽 벽면의 아트월과 저기 놓인 스피커를 한번 보시지요."
박 작가가 가리킨 벽면에는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하여 자연스러운 주름과 입체감을 살린 거대한 현대 미술 작품 같은 벽지가 시공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나팔 모양의 한지 진동판이 달린 오디오 스피커가 놓여 있었습니다. 박 작가가 음악을 틀자, 스피커에서 대금 소리와 첼로 선율이 방 안 가득 깊고 웅장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 벽지는 어르신의 두꺼운 장판지를 응용해 만든 친환경 입체 한지 아트월입니다. 어르신도 잘 아시듯 한지는 살아 숨 쉬는 종이이지 않습니까? 방 안이 건조하면 스스로 머금고 있던 수분을 내뿜고, 장마철에 습기가 차면 습기를 빨아들여 곰팡이를 막아주는 천연 가습기이자 제습기 역할을 그대로 해냅니다. 게다가 새집증후군을 일으키는 유해 물질을 흡수하고 미세먼지까지 걸러주니, 현대의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숲속의 공기를 선물하는 셈이지요. 그리고 지금 들으시는 이 스피커의 소리 역시 플라스틱이나 금속 진동판 대신 가장 질기고 가벼운 한지 진동판을 써서 만든 것인데, 소리의 떨림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따뜻한지 세계적인 음향학자들이 최고급 명품 스피커 소재로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깊고 따뜻한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벽면의 거칠면서도 우아한 한지 결을 손끝으로 쓸어보았습니다.
'세상에나... 시골집 문풍지로만 쓰이던 창호지가,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인들의 지친 눈을 달래주는 빛이 되고, 탁한 공기를 맑게 해 주는 허파가 되고, 아름다운 음악을 울려주는 악기가 되었구나!'
가장 한국적인 것이야말로 인류가 보편적으로 갈망하는 가장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해답이라는 사실을, 저는 그 젊은 예술가의 작업실 한가운데서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 5: 전통을 넘어 미래로, 세계 디자이너들과의 합창립니다.
서울 나들이를 마치고 다시 강원도 원주 산골 공방으로 돌아온 그해 가을, 제 조용하던 작업장에는 전에 없던 활기와 웃음소리가 넘쳐나기 시작했습니다. 손녀 지은이가 아예 대학원 연구 팀원들과 함께 제 공방 옆에 작은 현대 디자인 연구소를 차리고 내려왔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 아들 녀석도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정식으로 한지 장인의 길을 걷겠다며 고무장화를 신고 지통(紙桶) 앞으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맑은 시월의 가을날 아침이었습니다. 단풍이 붉게 물든 치악산 산길을 따라 대형 버스 한 대가 제 공방 마당으로 들어오더니,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밀라노, 그리고 미국 뉴욕에서 날아온 세계적인 건축가와 패션 디자이너, 문화재 복원가 스무여 명이 마당으로 우르르 내렸습니다. 지난번 루브르 박물관 복원 성공 소식과 밀라노 박람회에서의 호평을 듣고, 한지가 탄생하는 진짜 현장을 배우고 새로운 협업을 논의하기 위해 지은이가 초청한 귀빈들이었습니다.
"웰컴 투 코리아! 제 할아버지의 천 년 한지 공방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손녀 지은이의 유창한 영어 인사에 파란 눈의 디자이너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공방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저는 아들과 함께 깨끗한 한복 작업복을 차려입고, 마당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나무 지통 앞에서 전통 외발뜨기 시연을 시작했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 차가운 계곡물에 풀어진 하얀 닥나무 섬유와 닥풀 진액이 제 대나무 발 위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지 말입니다."
제가 줄에 매달린 대나무 발을 잡고 앞뒤로 출렁, 좌우로 찰랑거리며 물결을 일으키자, 외국인 디자이너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제 손끝만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앞물질로 얇게 바탕을 잡고, 옆물질로 가로세로 섬유를 촘촘히 엮어낸 뒤 발을 들어 올리자, 가을 햇살을 받아 진주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얇고 완벽한 한지 한 장이 마법처럼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오, 마이 갓! 아무런 기계 장치도 없이 오직 장인의 손감각과 물의 흐름만으로 저토록 균일하고 완벽한 두께의 종이를 만들어 내다니, 저것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고도의 예술 행위이자 명상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온 유명 가구 디자이너 로렌초 씨가 감격에 겨워 박수를 치자, 모두가 일제히 탄성을 쏟아냈습니다. 이어서 지은이와 박 작가가 나서서, 오늘 제가 방금 뜬 이 젖은 한지 위에 천연 쪽빛 염료와 옻칠을 더하고, 탄소 섬유나 광섬유 같은 현대의 첨단 소재를 결합하여 구부러지는 플렉서블 조명과 방탄복만큼 질긴 특수 산업용 한지로 발전시키는 새로운 실험 과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시연이 끝난 뒤, 저는 용기를 내어 로렌초 씨를 비롯한 외국 디자이너들에게 대나무 발을 직접 잡아보라고 권했습니다. 어설픈 자세로 찬물에 손을 담그고 발을 흔들던 그들은, 생각처럼 두께가 맞춰지지 않자 진땀을 흘리며 웃음을 터뜨렸고, 제가 뒤에서 그들의 손을 잡고 물 흐르는 박자를 맞추어 주자 마침내 그들 스스로 생애 첫 한지를 건져 올리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그날 저녁, 공방 마당에는 지은이와 박 작가가 만든 아름다운 달항아리 한지 조명들이 환하게 불을 밝혔습니다. 한지사 앞치마를 두른 아들과 손녀가 정성껏 준비한 시골 밥상을 가운데 두고, 한국 산골의 늙은 장인과 세계 패션을 움직이는 젊은 거장들이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뜨거운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술잔을 들고 마당 한구석에서 건조대에 걸려 가을 밤바람에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말라가고 있는 수백 장의 하얀 한지를 바라보노라니, 제 가슴속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아버님,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이름 없는 지장(紙匠) 선조님들이시여,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시린 손 호호 불어가며 지켜낸 이 하얀 종이 한 장이, 결코 시대에 뒤처진 낡은 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천 년 전의 기록을 지켜냈던 그 위대한 과학이, 이제는 전 세계의 예술과 문화를 살려내고 인류의 내일을 밝히는 가장 새롭고 빛나는 보물이 되었습니다!'
저는 곁에 앉아 외국인 디자이너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 손녀 지은이와, 묵묵히 제 빈 잔에 술을 채워 주는 아들의 든든한 어깨를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었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고, 가장 오래된 전통 속에 가장 눈부신 미래가 숨어 있다는 진리를, 치악산의 깊어가는 가을밤을 수놓은 한지 등불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고 따뜻하게 증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유튜브 엔딩멘트:
"여러분, 오늘 한지 장인 어르신의 목소리로 들어본 우리 한지의 놀라운 변신 이야기, 가슴이 웅장해지도록 흥미롭게 들으셨습니까? 그저 옛날 창호지나 붓글씨 종이로만 알았던 우리 한지가 세계 최고의 루브르 박물관과 바티칸의 보물을 복원하고, 세탁기에 빨아 입는 명품 의류와 친환경 가죽, 그리고 세계인의 거실을 밝히는 모던 인테리어 작품으로 극찬받고 있다니 한국인으로서 참으로 큰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천 년을 견디는 외발뜨기의 과학 속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가 정말 대단하지요? 오늘 이야기가 유익하고 감동적이셨다면 좋아요와 구독, 알림 설정까지 꼭 부탁드립니다! 다음 시간에도 세상을 바꾼 위대한 한국의 유산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